다양한 여행 수단 중 기차를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 시간은 좀 오래 걸려도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멍 때리고 보면서 갈 수 있고, 자동차보다는 덜 흔들리고, 운신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커피 마시고, 도시락, 간식 먹는 것도 좋고.
내 여행 인생 중 최종 목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인데, 당분간은 망한 거 같고.
미국의 암트랙(AMTRAK)을 알게 된 건 미국인과 결혼한 친한 언니 덕분이었다. 미국에서 기차여행은 상상도 안 해봤는데(자동차의 나라 아닌가!) 기차가 잘 되어있다고 해서 궁금하던 차였다.
코로나 때 밖에를 잘 못나가다 보니 여행 유튜브를 많이 봤는데, 암트랙 침대열차가 너무 시설이 좋았던 것이다! 심지어 음식들도 너무 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망설임 없이 암트랙을 타자!라고 결정하고 후다닥 미국 LA로 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내가 예약한 좌석은 Roomette로 한방에 위아래로 침대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열차 탑승 구간은 LA에서 시카고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떠나는 Southwest Chief 노선이었다. 티켓 가격은 좀 비싼 편이었는데 $766이었고, 원래 $623에 구입할 수 있었는데 주저하다가 그 가격의 티켓을 놓쳐버렸다. ㅠ

LA를 시작해 애리조나-뉴멕시코-콜로라도-캔자스-미주리-일리노이 시카고까지 총 7개 주를 지나는 미국 횡단 열차였다!

암트랙을 타기 위해 LA유니온스테이션에 도착했다.

마치 교회같이 생긴 LA유니온 스테이션.
암트랙은 비행기와 같이 체크인을 하면서 짐도 붙일 수 있었다. 또한 내가 구입한 Roomette석은 First Class로 라운지도 이용할 수 있었다. 나를 배웅 나온 친구들은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ㅋㅋㅋ 궁금하기도 해서 혹시 라운지에 함께 입장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만약 라운지에 자리가 충분하다면 가능하다고. 이때부터 암트랙 서비스에 급 호감이!

암트랙 라운지 입구. 간단한 먹거리와 커피, TV, 소파, 테이블 등이 놓여있어서 대기시간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너무 예뻤던 암트랙 컵. 기념품으로 팔면 좀 사오고 싶었는데, 없더이다 ㅠ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열차 타러 고고고!

건너편에는 서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Surfliner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땐 몰랐지. 내가 저 열차를 타게 될 줄. 아마도 복선이었을까?

내 앞에 도착한 거대한 암트랙 열차. 2층 열차인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위압적이야. 역시 천조국인가!

친구들과 창가에서 작별의 인사를 하고. 저 멀리 'Los Angeles'가 걸린 간판을 보자니, 진짜 떠나는 건가 싶고.

내 좌석은 2층이었고, 이렇게 의자가 두 개가 마주보고 있으며, 옆에 옷장도 있다.

전체적으로는 대략 이렇게 되어있다.

의자 옆에는 테이블을 넣었다 뺐다할 수 있게 되어있고. 메뉴판이 꽂혀있다. First Class는 기본 생수가 2병 제공되고, 도착할 때까지 저녁 코스 2번, 아침 2번, 점심 2번 총 여섯 끼가 제공된다. 식사는 열차 탑승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니 미리 체크해둬야 한다. 복도에는 암트랙 로고가 그려진 예쁜 컵과 커피가 무료 제공되고 있다. 이외에도 샤워실도 있고, 비누, 타월도 무료 제공이다. 이 정도 서비스를 100만 원이 안 되는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합리적이다.

앉자마자 어질러 주기 ㅋㅋ

하필 내방 맞은편에 Surfliner가 세워져 있다니. 이것도 복선인가. 심지어 비즈니스 클래스.

안녕 LA~ 즐거운 시간이었어!!

먼가 미드에서 많이 보던 저 정유통? 이제 슬슬 열차 구경을 나서 볼까?

또 다른 타입의 First Class인 Room. 여기는 $1000 이상 줘야 하는데, 확실히 좌석도 넓고, 안에 세면대도 있고 좋다. 친구들이랑 같이 타고 여행하면 좋을 듯.

복도에 놓여있던 무료 커피.

예쁜 암트랙 컵. 몇개 좀 챙겨 올 걸 ㅠ

가장 기대했던 Obervation칸. 여기 앉아서 멍 때리고 경치 구경해야지!

경치가 너무 좋자나. 그것도 편하게 기차에 앉아서 보니까 더 좋자나!

그리고 드디어 식사 시간! 애피타이저로 크랩 케이크를 시켰다. 그리고 레드와인으로 기분 좀 내주고. 기본으로 주는 빵은 걍 소소했다.

이 크랩 케이크는 진짜 강추하는데. 유튜버들이 먹는 거 보고 그닥 안 땡겨서 샐러드를 시킬까 했는데, 그래도 또 특별한 거 먹어줘야지 싶어서 바꿨는데,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다. 왜 이렇게 맛있어? 스테이크 먹기 위해 맛만 보고 남기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다 ㅎ

이런 경치를 보면서 먹었다구!

한창 애피타이저를 먹고 있는데, 이렇게 석양이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와 무슨 일이니. 영화네 영화.

그리고 대망의 암트랙 시그니처 아이언 스테이크(Flat Iron Steak)! 두둥!

솔직히 비주얼은 너무 좋았지만, 그래 봐야 기차에서 주는 스테이크가 얼마나 맛있겠어?라고 큰 기대는 안 했었다.

그런데 맙소사. 저 완벽한 굽기와 탄력이 넘치는 고기의 식감. 이건 웬만한 고오급 레스토랑 스테이크와 견줄만했다. 그래서 결국 또 다 먹어치우고.

후식으로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미국에서는 뭔가 치즈케익을 먹어줘야 할 것 같고. 근데 와 또 이게 왜 이렇게 맛있어?
암트랙 디너는 진짜 무조건 완전히 필수로 먹어줘야 한다!! 저녁도 배불리 먹고 경치도 구경하다가 슬슬 잘 준비를 하러 침대에 누웠는데.
다시 LA로 리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기차 탈 때부터 뉴 멕시코 산불 때문에 열차를 어딘가에서 갈아타야 할 거라는 안내가 나오긴 했다. 좀 귀찮겠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겼는데, 밤 12시 넘어 갑자기 다급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강풍이 심하게 불어서 뉴 멕시코의 산불이 우리 열차의 코스인 애리조나와 콜로라도까지 번지고 있다고. 그래서 방금 부사장이 연락 와서 열차를 돌리라고 했단다. 안내하던 직원이 자기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너무 미안하다고. 그로 인한 피해 보상에 대해서는 암트랙 CS에서 직접 연락을 할 거니까 핸드폰 잘 켜 두라는... 롸? 듣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니. 왜 그 산불은 하필 내가 고대했던 미국 횡단 열차 탈 때 나며, 하필 왜 내가 탄 열차가 가는 노선에서 난단 말인가! 아니 나 지금 어디 영화 속에 있니? 이게 말이 돼?
와 그때부터 나는 난리가 났고, 마침 안부를 물으러 연락 온 친구에게 나 다시 LA로 돌아간다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내가 탄 열차는 바스토(Barstow)라는 곳까지 갔다가 열차를 돌려서 다시 LA 유니온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ㅋㅋㅋㅋㅋㅋ. 후아...

잊을 수 없다. 바스토. 내 친구도 잊지 못한다 ㅋㅋㅋ.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나는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질 못했다. ㅋㅋㅋ
하필 돌아오는 중에 한국 번호를 쓰는 핸드폰은 꺼져있고, 새로 산 아이폰은 중간에 먹통이 돼서 날 너무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등록해뒀던 이메일로 암트랙의 안내 메일이 왔으나 결국 통화는 하지 못했다. 다른 승객들한테 물어봤더니 암트랙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 두 명 정도고, LA 역에 가면 매니저가 안내해줄 거라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했다고...
열차에서 내릴 때 어떤 승객이 승무원과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 승무원 할머니 왈(암트랙에는 어르신 승무원이 엄청 많다) "내가 40년을 암트랙에서 일했는데, 열차가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미국에서 이런 경험 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40년 일한 분도 처음 겪는 일을 겪은 여행객이 바로 나야 나!

결국 LA 유니온 스테이션에 새벽 3시 20분쯤 도착했고, 다들 허탈하게 터덜터덜 창구로 갔다.
창구에서 흑인 스태프가 홀로 이 많은 승객들을 대응하고 있었는데, 머 그들도 무슨 방법이 있겠나? 일단 이름 적어두고 다른 열차를 알아볼 건지 취소할 건지 물었다. 나는 머 여기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환불 신청했다. 그랬더니 세상 반가워하는 눈치? ㅋㅋㅋ 그래 차라리 이게 서로 편하지.
하지만 여기서도 느껴지는 흑인과 백인의 격차는, 백인 매니저인듯한 사람은 사무실에서 흑인 스태프가 물어보면 지시하고 밖으로는 절대 안 나오는 것이다. 결국 궂은 민원처리는 흑인 스태프의 몫. 보다 못한 한 백인 아저씨가 뒤에 있는 매니저에게 당신이 책임자냐고 물어보면서, 그런데 왜 당신은 나와보지도 않냐고 했다. (오 쎄다.)
결국 그 백인 매니저는 마치 못해 창구 밖으로 나와서 이런저런 얘기하는데, 일단 숙소는 제공해줄 수 없고.(당연하지 새벽 3시에 어디서 숙소를 구해) 우리도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다.라는 뻔한 얘기뿐. 그 백인 승객 아저씨는 매니저의 그 말에 우리가 기차를 돌려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4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뭐 하고 있었냐라고 항의. 오 이게 소비자의 천국 아메리카인가!
하지만 아저씨의 강한 항의에도 매니저는 대합실에서 차가 다닐 때까지 지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정도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래 뭘 더 할 수 있겠니. 그래서 다들 걍 그렇게 그렇게 마무리.

와중에 유니온 스테이션 대합실 예쁘네 ㅋㅋㅋ
내가 비행기표를 LA-In, 뉴욕-Out으로 끊어놨기 때문에, 어떻게든 뉴욕으로 가야 했다. LA로 돌아오는 동안 이리저리 궁리를 해봤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일단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가는 암트랙은 취소하고(암트랙 보험을 들까 말까 했는데, 들어놓길 잘했다. 덕분에 취소수수료가 없었다). 시카고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까 했지만 일단 시카고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애초에 기차 타고 가는 거에 의의를 뒀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아웃하는 걸 포기하고, 남은 시간을 서부에서 보내다가 그냥 LA에서 아웃하기로 했다. 또 마침 샌디에이고로 가는 열차가 새벽 6시 10분에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포기했던 샌디에이고 여행이 이렇게 부활했다! 친구보고 다시 데리러 나오라고 하기도 뭐하고, LA에서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ㅋㅋㅋ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는 샌디에이고로 출발하게 됐다!

안녕? Surfliner! 아마도 너를 타게 될 운명이었나 봐. ㅋㅋㅋ

샌디에이고로 가는 중에 이렇게 일출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값진 경험이다.

이렇게 뜨거운 태양과 함께 미국 여행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서프 라이너는 해변가 기차답게 이렇게 멋진 바닷가를 보면서 갈 수 있었다.

저녁에 배부르게 먹었지만 새벽 내내 제대로 못 자고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마땅히 연 식당도 없고 해서 빵과 커피가 제공되는 비즈니스 클래스로 끊어서 아침은 일단 해결. 빵은 걍 그냥저냥. 머 많이 먹히지도 않았어.
어찌 보면 황당하고 화나고, 열받을 상황인데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일단 열차에서 자고, 암트랙 디너 코스 먹고, 창밖 경치 구경하는 게 목표였는데, 대충 다 해보긴 했으니까? ㅋㅋㅋ심지어 전액 환불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개이득? 나 너무 긍정적이니?

그렇게 정신없던 시간을 보내고 2시간 30분 정도 만에 도착한 산타페 역.
와... 도착하자마자 샌디에이고 날씨가 너무 좋고 심지어 역이 너무 예뻐서 간 밤에 일어난 일은 바로 잊혔다.

역사 안도 너무 예쁘자나 ㅠㅠ

기차역 밖, 바닥에 있는 산타페 역 표시.
이건 아마도 운명이었던 걸까? 나 너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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